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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12:44:35)

이 야 기

 

 

 

최근 영화공간 주안에서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연출한 ‘블레이드 러너’를 스크린으로 관람하였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것은 중학교 시절의 일로, 아버님의 해외 출장이 비교적 잦다는 친구네 집에서 지금은 보기조차 힘든 일본판 LD를 통해서였다. 아무래도 당시로서는 영화가 지니고 있는 철학적인 맥락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그저 여성의 가슴이 노출되는 장면을 자세히 뜯어보려고 친구와 함께 어른들 몰래 몇 번이고 되돌려가며 재생해댔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내가 ‘블레이드 러너’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경로가 비록 금기된 영역(일본어 자막을 대하는 것 역시 일본 문호개방 전이었던 당시를 살피면 무언가 불온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었을지라도, 애당초 다른 목적으로 접근한 사람들마저 주변부를 겉돌기만 하다가 끝내 영화의 근간이 되는 부위에 무의식적으로 몰입하게 만들 만치 영상 언어의 흡입력이 상당하여 영화라는 시청각 매체가 말초 감각, 이를테면 살갗에까지 풍겨와 무의식에 투영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내가 블레이드 러너에 관하여 꺼내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회자되었을 영화적 성과의 찬탄이 아니다.

 

칼날 위의 욕망

 

영화 속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계층이 다루어진다. 리플리컨트Replicants(복제인간)와, 그를 창조한 타이렐 박사,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리플리컨트를 ‘폐기’시키는 일을 전담하는 형사)인 데커드.

먼저 리플리컨트들은 지능 면에서 자신들의 창조주와 대등할뿐더러 육체적인 기력이나 민첩성 따위가 훨씬 우수함에도 그들의 능력은 본래의 생산 목적대로 인구 폭증으로 인한 지구의 포화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군사력 및 노동력으로 착취당한다. 그리고는 고작 탄생한 지 4년 만에 숨을 거두게 되는 노예계층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영생이 아니라 누구나 누리는 보편적인 생의 길이, 즉 평범함이다.

타이렐 박사의 경우, 유전공학자로서 인간과 대등한 능력을 지닌 통상의 리플리컨트와 그보다 진보한 넥서스 6 리플리컨트Nexus 6 Replicants를 창조한 장본인으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니며 지적 유희를 소일 삼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늘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이면에는 리플리컨트의 우수함에 대한 일종의 번거로움, 더 나아가서는 두려움을 품고 있어 그들이 단명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소수 리플리컨트 세력들을 저지하기 위해 블레이드 러너를 사주하는 지배 계층이다.

마지막으로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 형사는 타이렐사의 입김이 닿았을 상급자의 지령인 리플리컨트 폐기를 수행하기 위해 아무런 의심 없이 맡은 바 소임을 처리해 나가는 일반 계층이다. 영화에서는 데커드가 일상의 고단함을 털어내며 다분히 직업적인 태도로 리플리컨트의 폐기에 나서지만, 타이렐 박사가 요절한 자기 조카의 기억을 이식해 만든 또 다른 리플리컨트인 레이첼과 연정을 나누게 되면서 그의 입장은 전과 다른 방향으로 놓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영화 속 특정 인물의 감정선을 배제하고 블레이드 러너라는 직책만을 두고 보았을 때, 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적 이익이 특정 소수에게만 몰리게 되는 구조가 강력하게 유지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배 계층의 욕망에 의해서이기도 하나, 바로 그 아래 층위에서 상위 계급을 찬양하고 자신들 또한 그 특권계층에 편입되길 꿈꾸는 소위 예비 상위계층의 통속적 희망이 원인이며, 거기에서 그 허황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그림자는 언제인가 자신들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권익을 보전키 위하여 기꺼이 하위계층의 삶을 착취하는 데 일조하거나 방임하는 태도에 관한 일체의 문제의식을 감춘다.

 

우리 사회는 무엇을 꿈꾸는가

 

‘블레이드 러너’는 1968년에 출간된 필립 K. 딕의 원작 SF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영화화 하여 1982년에 개봉한 작품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LD는 레이저디스크Laser Disc의 약자로, CD와 같이 광 신호로써 내용물을 재생할 수 있는 저장 매체이나 그 크기가 기존의 LP만하다는 불편으로 인해 DVD가 보급되면서 사실상 생산이 중단된 것으로 보이며, 그 DVD 역시 블루레이 시장에 의해 서서히 밀려날 조짐을 띄고 있다. 2011년인 지금에 이르러 많은 기술들이 진보를 이루었고 블레이드 러너의 시대 배경인 2019년은 이제 아주 가까운 미래로 다가왔으나 영화 속의 불합리한 계층 구조는 여전하다. 과거의 영화가 현재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그린 SF여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류를 해당 장르를 통해 한낱 공상인 것 마냥 역설했기 때문이고, 그런 기형 구조가 그대로 지금까지 세습되어 온 것일 뿐이다. 비근한 예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들 수 있겠다. 1976년에 발표된 이 소설 속의 참담함은 시대를 요즘으로 뒤바꾸어 놓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도리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비문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탕진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 초인 지금 여러 기류를 타고 진보가 집권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그리 헛되게 여겨지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과연 2019년 경의, 혹은 더 먼 미래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계층 간의 입지만 뒤바꿀 뿐 고착되어 온 구조를 평등한 꼴로 재편해 나가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영화 속의 암울한 분위기를 예사로이 보지 않게 되었던 것은 단순히 영상미에 매혹되어서만은 아닐 거다. 그는 바로 여전히 우리 삶을 헐고 있는 실제의 암담한 현실에 대한 동의이지 않았을까?

 

이야기ㅣ편집위원 yiyagi-@hanmail.net